2009/06/06 22: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콜콜



강연 준비 기간은 참으로 넉넉했다. 강연을 기획하고 허락받아 제반 준비를 했던 시간들은 실로 머리가 좋지 않은 나로써는 딱히 특별한 기억을 해보려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에 비해 강연과 그 후에 있던 뒤풀이는 객관적으로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그대로 박혀있다, 여전히.

2년 8개월 동안 저리도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저건 흡사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거라고 느껴졌다. 실로 대단했다. 처음에는 과 선배로서 자랑스러웠는데,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으로서 감탄스러웠는데, 나중에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경외로웠다. 나무를 쓰러뜨리는 번개라든지, 지상의 모든 물체를 뒤죽박죽 흔들어 놓는 해일 외에는 외경의 마음을 갖지 못한 나로서는, 기억을 하는 한, 처음으로 살아있는 인물에 대해 갖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왜 가르칠 것인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저런 물음에 미약하지만 스스로 답할 수 있다면, 30년이 흐르게 되면 과연, 단연코, 반드시, 혹은 어쩔 수 없더라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이해와 지구상의 존재하는 수 많은 도를 깨우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사람과 바로 옆자리에서 술을 따라주고 그가 따라 주는 술을 역시 따라 마셨다. 무슨 만유인력의 법칙 마냥, 이런 사람들과 먹는 술자리는 전혀 예외없이 취하지도 않는다. 새내기 시절, 즉 바야흐로 4년 전 이후로는 가지 않았던 술집에서 2차를 갖었고, 3차로 예상했던 24시간 술집 두군데가 없어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없이 우리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를 한 지 채 닷새가 되기 전에 이런 사람을 집으로 모신 것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4시, 언제부터인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뒤풀이를 임함에 있서 개인적으로 신성시 여기는 그 시간에, 우리집에서 3차가 시작되었다. 시작한 지 30분 만에 기억나지도 않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내려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술을 따르고 웃고 떠들었으며, 해가 뜬지 약 1시간 56분 48초가 지난 후에야 정리하기로 했다.

꼬박 반나절, 3일 19시부터 4일 7시까지, 12시간 동안, 그녀가 무수히 뱉었던 많은 말들 중에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음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의 철학을 가지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실천은 커녕, 단지 상식을 운운하는 것도 상식을 거스를 수 밖에 없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을 외칠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두고간 우리의 자그마한 정성을 드리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 정신에, 볼품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라 연락도 없이 기차역에 내렸으나, 결국, 어쩔 수 없이 예상과는 한 참 거리가 먼 볼품없는 모습으로 터미널에서 전해드렸다. 그리고 30분만 자고 일어나 학교에 가서, 그녀처럼 멋지게, 서른 아홉명의 일흔 여덟 눈동자가 나에게 빨려드는 희열을 온 몸으로 느끼고자 했던 결심은, 너무나 쉽게, 2시간을 자고 일어나 머리도 감지 못한 채, 여덟살 난 반짝거리고 말똥말똥한 시선 앞에, 흔들리는 두 눈동자와 부끄럽고 초라하며 두껍기만 한 낯짝의 고열이 대신했다.

 
tonight, tonight

덧글

  • 댕구리 2009/06/07 08:20 # 답글

    술 한 잔 생각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 책에봐라 2009/06/08 02:44 # 삭제 답글

    여덟살 난 반짝거리고 말똥말똥한 시선 앞에, 흔들리는 두 눈동자와 부끄럽고 초라하며 두껍기만 한 낯짝의 고열이라ㅋㅋ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덟살 난 반짝거리고 말똥말똥한 시선들의 희망이오^^
  • Leedo 2009/06/08 21:55 #

    저도 희망이 되는 걸 희망합니다. 고맙습니다.ㅋㅋ
  • 고미진 2009/06/12 09:37 # 삭제 답글

    강연 가고 싶었는데 ㅜ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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