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육과 ‘취업공부’
이른바 ‘청년실업’ 현상으로 인하여 대학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대학사회에 ‘취업공부’라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가 형성되기 시작하더니 ‘청년실업’의 희생자들인 대학생들은 물론이요, 대다수 대학운영자들에게까지 퍼져서 대학교육을 위협하는 데까지 이른 듯하다. 가짜가 진짜를 ‘잡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한 한국의 풍토에서라면, 이 신종 이데올로기가 대학교육을 완전히 ‘잡아먹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에서 구상되었다.
1. ‘취업공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현재 대학가에서 학생들에게 ‘취업공부’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토익 혹은 토플, 한자능력검정시험, SSAT로 주로 구성된다고 한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고학년이 되면 (아니면 취업준비를 해야한다고 판단되는 학년이 되면) 자신의 전공에 관계없이 이것들을 공부한다고 한다. 물론 이 이외에 입사했을 때 무엇이 일반적으로 필요한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엑셀, 파워포인트 등의 소프트웨어를 배우는 것이 취업공부가 될 수도 있고,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고시공부가, 또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로 곧바로 취업할 전망을 가진 졸업생들에게는 전공공부가 곧 취업공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취업공부’로 분류되지 않는다.
‘취업공부’를 구성하는 공부들―토익 혹은 토플, 한자능력검정시험, SSAT―이든 아니면 취업에 도움이 되는 다른 공부들이든 그것들이 그 자체로 결코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이 개별 공부들 자체가 아니다.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취업공부’를 대학에서 본래 제공하는 교육으로부터 분리하여 그것보다 우선시하고 전자로 인해서 후자를 소홀히 하는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은 자본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능력의 양성에서 실패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하다. 능력이 없는 졸업생이 어떻게 취업에서 성공할 수 있겠는가? ‘취업공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뽑아주는 회사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예의 사고방식을 그것이 허위의식이라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면서 조장하는 대학운영자들은 ‘실용교육 이데올로그’라고 부르고자 한다.1)
2. 취업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취업공부’가 아니라 실력의 양성이다.
우선 인간을 지적․정서적․신체적으로 성장시켜 주는 모든 교육은 결국 취업에 기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취업이란 결국 인간의 능력이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자본과 만나는 것이고 인간의 능력이란 지적․정서적․신체적인 성장의 과정을 통해 양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교육이 직장에서의 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느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치느냐, 오래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일시적으로 영향을 미치느냐의 차이는 있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사회적으로 큰 효력을 발하는 능력일수록 양성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며, 따라서 교육이 대중화되는 시대에는 고학력일수록 이런 능력을 갖게 되어있다. 요컨대, “사회적으로 큰 효력을 발하는 능력”의 양성이 일반적으로 대학이 취업과 관련하여 제공할 교육의 핵심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도 이 능력을 몹시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능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한 두 특징은 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연결성(connectedness) ② 비물질적 생산물(정신과 정서의 산물)이 점점 더 주요한 상품이 되는 경향이다. 기업들 자체가 이 경향에 맞추어 재편되거나 새로이 형성된다. 따라서 이 두 특징과 관련된 능력의 양성에 집중하는 것이 취업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연결성과 관련된 교육에서는 당연히 언어가 그 핵심이다. 연결성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기에 소통을 의미하고 소통은 언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2) 따라서 대학교육의 기본은 언어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대학이 제대로 교육을 하는 곳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그 대학의 언어교육의 실상을 보면 된다. 최근에 들어와서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학졸업생들에게 제일 부족한 것이 소통능력으로 계속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은3) 양쪽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실용교육 이데올로기’가 특히 언어와 관련해서 큰 해악을 끼치고 있음을 입증한다.
비물질적 생산물(정신과 정서의 산물)은 상상하고 창안하는 것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예컨대 소프트웨어적 기술만 가지고서는 게임 소프트웨어가 나올 수 없다.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맞다. 기술은 항상 필요한 자원이다. 그러나 기술의 혁신도 결국은 창안에서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상상과 창안 능력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취업교육이 될 수 있다. 사실상 이는 지금까지 대학의 정규 교과과정에서는 감당하지 못했고 교과과정 외부에서의 학생들의 자발적인 활동에서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텐데, ‘취업공부 이데올로기’가 승하게 되면서는 학생들이 ‘취업공부’에 흡수되면서 상상과 창안 능력을 양성하는 활동이 극도로 위축되게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다시 활성화할지가 앞으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할 대학인들의 과제이다.
이렇듯 이른바 정보사회 혹은 지식기반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언어공부, 그리고 상상과 창안 능력을 높이는 공부가 ‘취업공부 이데올로기’로 인해서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대학운영자들에 의해서 점점 더 침식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대학에는 왜 오는가? ‘취업공부’는 학원을 다니면서 해도 되는데...... 돈 아끼는 데 혈안이 된 대학의 시설보다 쓸 돈을 안 썼다가는 당장에 망하는 학원의 시설이 더 나은데...... 아마 ‘졸업장’이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가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이 ‘졸업장’을 필요로 하던 시대는 지났다. 자본은 특정의 능력을 필요로 하며 이 능력이 소진된 껍데기는 법의 도움을 받아 즉시 버린다.
언어공부, 그리고 상상과 창안 능력을 높이는 공부로 뒷받침만 된다면, 어떤 졸업생이 자신의 전공분야로 취업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분야로 자신을 열어놓을 수 있다. 아니, 심지어는 새로운 분야를 창안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강력한 공부이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는 대학에서 전공한 특정의 전문지식을 등에 업고 취업을 해도 문제가 완전히 풀리는 것이 아니다. 평균적인 미국인이 6번 직업 혹은 경력을 바꾸고, 전문지식의 반감기가 겨우 5년이라고 하는데,4) 신자유주의의 깃발이 드높은 한국에서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을 조성될 리는 없다. 몇 년 다니면 ‘단물만 빨리고’ 직장을 나오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교육의 목표는 학생의 첫 번째 직업을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직업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옛말이 현재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제임스 J. 두데스탯의 말5)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책임있는 대학운영자들이 할 일은 아닌가. ‘실용교육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고민의 지평을 검은 구름으로 가려버린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실용공부 이데올로그들’이 영어교육 만큼은 상당히 강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취업공부 이데올로그들’이 생각하는 영어교육은 토익공부 혹은 그와 유사한 공부를 넘어서지 못한다. 토익공부란 취업에서 유리함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간주되는 토익 고득점을 목적으로 토익 문제집을 가지고 하는 공부를 말한다. 자신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배양한 영어실력을 시험에서 백퍼센트 발휘하기 위한 연습으로 토익문제집을 푸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토익에서 고득점을 하려면 토익공부를 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토익공부를 통해 푸는 기술을 좀 습득해서 점수가 조금 오를 수도 있겠지만, 언어능력이 이런 식의 잔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한계에 부딪친다. 토익 고득점은 영어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상식이다. 토익문제집으로 공부해서 영어실력을 높이면 되지 않느냐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문제집만으로 언어공부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우습기 짝이 없고, 또 토익이 전제로 하는 지적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토익에서 고득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영어실력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되지 못한다. 언어공부의 기본은 읽기의 경우 그 언어로 잘 쓰인 글들을 읽는 것이다. 말하기의 경우는, 우선 다채롭고 살아있는 대화들을 많이 알고 그 다음에 말하는 연습을 통해 그 표현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듣기의 경우에는 실제로 많이 듣는 것이 핵심이다. 토익공부는 이 모든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토익공부를 하는 것은 그만큼 영어공부를 안 하는 것이 되기 십상이고, 따라서 토익 고득점에서도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학생들은 늘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이 잘못된 생각이 대학을 다니면서 고쳐지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대학운영자들이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더 나아가 이에 따라 영어교육을 바꾸려고 한다는 데 있다. ‘실용교육 이데올로그들’이 말하는 영어교육, 실용영어 교육이란 바로 이것이다. 아마 현재의 영어강독을 모두 토익강의로 바꾸는 것이 교양영어교육과 관련하여 그들이 승리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대학을 학원으로! 이것이 그들의 보이지 않는 구호이다.6) 그것이 대학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 줄도 모르면서.
3. ‘실용교육 이데올로그들’은 취업난의 원인과 해결책을 호도한다.
‘취업공부 이데올로기’가 생긴 것은 취업난 때문이다.7) 그리고 취업난의 원인은 사회적인 차원의 것이다. 경제학 전공이 아니더라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알 것이다. 노동력도 상품이기 때문에 취업도 마찬가지 메커니즘에 종속된다. 취업난은 일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의 수에 비해서 일자리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생긴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는 데 왜 일자리가 줄어드는가?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일반적인 성격과 한국 사회의 특성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전자에 대해서 말해보자. 그 이유를 무엇으로 보든 자본주의는 기계의 힘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극적이고 대대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이것을 ‘재구조화’restructuration라고 부른다.)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든 그 궁극적인 결과는 일자리의 수가 줄어드는 경향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발전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 안에 다시 기계화의 경향이 작동하기 때문에 결국 전체적으로 보아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람이 일하는 자리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청년실업의 원인 중 하나는 기계의 가장 현대적 형태인 컴퓨터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것이다.
취업난을 초래하는 둘째 원인은 경제가 줄곧 대기업중심으로 운영되어온 한국의 고질적 병폐이다. 대기업들은 정치가들 및 법률가들에게는 훌륭한 ‘돈줄’이고, 엘리트 대학졸업생들에게는 좋은 직장의 제공처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제공가능한 일자리의 수는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따먹은 과실의 크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더군다나 정보화의 열풍에 따른 컴퓨터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열풍에 따른 인원감축은 오히려 다른 곳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크기에 비해 훨씬 덜 뽑는다. 잠재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생산부문을 창출하기도 하는 중소기업들은 정부와 은행의 무시 속에서 경제가 조금만 어려워도 지탱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일자리가 어디서 더 생기겠는가?
이렇듯 취업난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다. 따라서 취업난 해결의 바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행정부든 정치권이든 사회적 해결을 담당해야 할 사람들의 무능에 대해서는 여기서 거론하지 말자. 우리의 시선을 대학에서 무엇을 노력할 것인가에 맞추자. 대학이 사회의 지적 활동의 중심이라면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적 차원에서의 문제해결이라는 지평을 볼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자유로운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래야 이들이 나중에 사회의 중심세대가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용교육 이데올로그들’이 하는 일은 학생들의 시야를 원자화된 개인들의 차원에 가두는 것이다. 열심히 취업공부를 하면 된다고, 취업이 안되는 것은 취업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취업공부와 관련이 먼 학과들은 대학에 있으면 안된다고, 등등. 어떤 한 개인을 고정된 중심으로 보면 취업공부를 잘 하면 취업이 잘 된다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다. 취업후보생이 모두 100명인데 일자리는 다 합쳐서 50개라면 100명이 모두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중 50명밖에는 취업을 할 수 없다. 해가 서쪽에서 뜨더라도 이는 바뀌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실용공부 이데올로그들’은 성공한 졸업생은 취업공부를 잘 한 것으로, 실패한 졸업생은 취업공부를 게을리 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을 유일한 시각으로서 학생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학생들에게 키워주어야 마땅한,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위한 지적 노력의 싹을 애초에 잘라버리는 것이다.
진정으로 학생들의 취업에 관심이 있는 대학운영자라면 먼저 학교 바깥에서 취업난의 사회적 해결을 위해서 스스로 노력할 것이고, 학교 안에서는 한편으로 학생들을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그런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지혜를 지닌 인재들로 키워내도록 힘써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 자본이 진정으로 원하는 능력을 학생들에게 양성해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교육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취업교육이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이유는 현실에 대한 무지이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 결과는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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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그’를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2) 나는 이 글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교육을 예로 들겠지만, 사실 언어란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기호들(수학의 기호들 포함), 이미지들을 다 포함한다. 컴퓨터 프로그램들, IT 산업을 받치는 모든 소프트웨어들도 언어로 이루어진다. 몇 년 전에 소프트웨어 대학 모과의 학생이 영문과 전공과목을 들으러 왔었는데, 앞으로 프로그래머가 되고자 한다는 이 학생은 그 기본 바탕으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해야하기 때문에 들으러 왔다고 말했다. 무슨 컴퓨터 관련 영어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영어문장 해독능력을 양성하기 위한 과목을 들으러 왔다는 것이다!
3) 앞의 게시글 「영어원어교육의 허와 실」 참조.
4) Frank H. T. Rhodes, The Creation of the Future: The Role of the American University (Itahca & London: Cornell UP, 2001), 86면 참조.
5) 제임스 J. 두데스탯 지음, 이철우․이규태․양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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