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 허지웅의 GQ마지막 글인 듯.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그들의 진중함이 있다는 말에 뻑. 인생은 그렇게 살아가는 거구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게 삶이구나./
언뜻 초현실적이라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적당한 시기에 적확하게 해내야 할 일’이라는 일종의 미션들이 주어져 있다.이를테면 내가 자란 동네에선 중학생이 되기 전에 여태 모은 구슬이 최소한 1000개를 넘어야 했다. 놀이터 구릉에 기반한구슬계를 등지고 세상모르는 어린 것들에게 1000개의 구슬을 모두 물려주는 의식은 숭고한 것이었다. 서른 살이 되자 통장잔고와결혼과 육아와 거기에 함몰될 개인의 인생을 다른 무엇보다 고민하게 됐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기어이 어쩔수 없는 공기의 무게가 있다. 어쩔 수 없지 않은 걸 어쩔 수 없어해야하기 때문에 초현실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정할 수 없이, 어쨌든 삶에는 불가항력의 단계들이 존재한다. 불만이 큰 사람에게나 덜한 사람에게나 돈이 많은사람에게나 적은 사람에게나 그것은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다. 혹은 이겨내야 한다고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때때로 이겨내야 한다고강요되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 몇 가지는 생리적 요구다. 나머지는 사회적 의례다. 하지만 그 구분은 건전한 사회인이라는 굴레안에서 거듭 의뭉스레 지워진다.
제 때 구르고 앉고 입을 떼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니 해내야 하는 것에서부터우리는 그 미칠 듯 원대한 사회화의 단계 위에 서게 된다. 초등학교를 무던히 중학교를 별 탈 없이 고등학교를 처지지 않고 졸업해끝내 대학에 입학해내야 한다. 물론 그 안에는 셈법과 알파벳과 국민교육헌장과 교가와 (당신이 교인이라면) 주기도문을 외워내고육성회비를 지불하며 운전면허를 따내야 하는, 몇 가지 단계들이 사소하게 생략돼있다. 사내아이의 경우, 어느 날엔 외계인에납치라도 되듯 어렴풋이 군대를 가고, 기껏해야 몇 살 더 많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성숙하지도 않은 장교들에게 경어를 써 가며복종을 가장하다 무난히 제대해야 한다. 제대를 하면 종종 예비군 훈련에 나가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학점이 차면 졸업을 하고,졸업을 하면 아마도 요즘에 가장 쉽지 않을, 취업을 해내야 한다. 서른을 넘기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뭔가를 담보삼아얼마간의 빚을 짊어져야 하고, 또 그걸 지겹도록 갚아 나가야 한다. 빚으로는 차를 사고 집을 사고 펀드를 사고 알량한 재테크를해야 한다. 그리고 새끼를 낳아야 한다. 이제는 가족의 생계를 건사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여태 밟아온 단계들의 고단한무게감을 끝내, 새끼의 삶에 전수해내야 한다.
이 과정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자꾸 처연해진다. 땅에 코를박게 된다. 사회의 건전한 일꾼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그 모든 단계는, 이를테면 몽정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지랄 맞게도,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몽정을 하듯 군대를 가고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듯 장가를 가고 소녀의 젖가슴을 훔쳐보듯 아비가 돼야한다. 반복되다 기어이 굳어져버린, 삶의 해묵은 경직성이다. 비관이라 욕해도 방법이 없다. 그것은 쿨한 척 몇 번을 반복해부정해도 소용없고 짜증스레 어찌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불가항력의 단계들은 삶에 보편적으로 뿌리내려 근거하고 있다.그러니까 이건 요컨대, 삶의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 보편성의 연장선 위에 스스로를 위탁하는 일은 사실너무나 빤하게도, 어리석어 보인다. 아주 편하게 말하자면, 이건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서 결혼하고 집 사고 애 놓고 뼈 빠지게부양하며 빚 갚다가 조금 살만해지면 불륜을 저지르거나 암 걸려 뒈지는” 삶의 한심함에 기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라도그 굴레 속에 침전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다만 한줌의 행복을 기대하고 뛰어들 것인데, 확률로따지자면 불편부당한 게임이다. 왜 우리는 스스로를 가루만 남을 때까지 착취하다가 죽어 넘어져야 하는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도그러해야 한다는 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타당한 행동양식이란 자주 상스럽고 구태의연하다. 누구라도그러하다는 말은 심지어 천박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 말은, 특히 한국에선, 나와 다른 남을 타박하고 무시하고 착취하기 위해자주 동원되는 뉘앙스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살지 않으면 도태돼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라는 열패감마저자극한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러하다는 것이 천박한 만큼, 누구라도 그러하다는 것은 또한 위대한 것이다. 지상에존재하는 어떤 문자와 혓바닥의 유희도, 단 한 명 개인의 삶의 흙냄새를, 땀냄새를 조롱할 순 없다. 새끼를 두드려 패는 어느파렴치한의 인생부터 거대한 에고를 지닌 위인의 삶까지 아우르는 어떤, 알 수 없는 진중함이 존재한다. 빤한 삶의 한심함에 대해충분히 알고 있거나 최소한 아련하게 짐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주뼛거리며 몸을 던져 참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때문이다.
그것의 정체는 요컨대, 살아나간다, 는 관성의 절박함이다. 삶은 모든 이에게 무겁고 질퍽하다. 그공평무사한 상대성에 의해 우리 인생은 때때로 환희에 차오르되 대개 힘들고 우울하다. 삶의 이 가공할 무게감은, 예의 그 관성에의지하지 않고선 좀체 이겨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반복해서, 관성을 갖고, 절박하게,살아나간다. 인류라는 종족은 그렇게, 지구라는 행성 위를 버티고 살아 짝을 찾고 새끼를 보호하고 빤한 끝을 향해 달음박질쳐온것이다. 역사 동안 되풀이해 켜켜이 쌓여 온 그 ‘멍청한 반복’들의 두께를 가늠하려는 시도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벅찬습기가 차오른다.
물론 경쟁사회의 논리에 묻혀 자기 자신을 망실해가는 게 삶의 위대함이라는, 뿌옇게 거대한 말로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다만, 생을 이어나가게 만드는 관성과 그 절박함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떤 훌륭한 수사로도 삶의 지난함을침범할 수 없다.
배인숙이 부른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는 반복되는 음색의 네 가지 큰 구절로 이뤄져있다. 이곡은 세 번째 구절까지, 누구라고 그러하듯이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거울을 보면 생각이 난다, 눈을 감으면 생각이 난다, 고거듭해서 회상한 끝에야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창가에 앉아 하늘은 본다”며 현재시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는이제 떠나련다, 저 푸른 하늘 너머”라고 끝을 맺는다. 그 점증적인 반복의 과정이 단지 감정을 고조시키는 화술이라고 생각했었다.아니다. 거기에는 삶의 반복성을 관통하는 도저한 성찰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 글은 애초 반복되는 삶의 끔찍함에 대해 토로할작정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 보편적인 관성을 얼핏 환기한 것만으로도, 빤한 삶의 한심한 원리를 지적할 마음 따위는 깨끗이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어리고 얇은 치기 또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허지웅 (GQ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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